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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흔들리는 건 카메라인가, 그인가 <아들(Le Fils)>


대학교 영상제작 수업에서 제일 먼저 배운건, 카메라는 보는 사람의 눈이라는 것이다.

영화 <아들>의 눈은 집요하고 관음적이다. 불친절할 정도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무작정 한 남자의 뒤를 쫓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남자의 뒤통수를 따라가거나 남자의 표정을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음악이나 대사없이도, 주어진 정보 없이도 불안한 움직임과 눈빛만으로 그의 불안이 전해져온다.

보는'나'와 남자의 감정이 하나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볼 사람이라면 영화에 대해 찾아보지 않고 바로 보는 걸 추천하고 싶다. (포스터, 이 리뷰까지도)

반전이 있거나 비밀이 숨겨진 영화는 아니지만 사전정보없이 봐야 영화에 좀 더 깊게 몰입할 수 있는 듯하다.



줄거리

 

가구제작훈련센터에서 소년원에서 나온 소년들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는 5년 전 아들을 잃고 아내와 이혼한 뒤 혼자 살고 있다.

어느 날, 열여섯살 소년 프랑시스가 새로 훈련센터에 들어오게 되고 올리비에는 이상스레 불안과 흥분을 보이며 프랑시스를 은밀하고도 집요한 시선으로 쫓는다.

프랑시스는 목공에 열의를 느끼며 능숙한 올리비에에게 점점 다가가려하지만, 

올리비에는 냉정함으로 일관하면서도 증오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눈길로 끊임없이 프랑시스를 지켜본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아무도 당신처럼 하지 않을거에요."

"나도 알아"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거죠?"

"나도 모르겠어."

'아들을 죽인 그 아이를 만났다'는 한국판 포스터처럼 프랑시스는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인 아이였다.

불안한 카메라만큼이나 불안한 몸짓과 눈빛으로 아이를 지켜보는 올리비에.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채 올리비에에게 다가오고

올리비에도 증오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눈빛으로 선을 그으면서도 아이를 모호하게 잘 대해준다.


영화는 용서를 말하는 걸까?


아들이 나오지 않음에도 제목이 아들인 까닭은, 올리비에가 프랑시스를 아들과 겹쳐 보고있기 때문일까? 

불행한 아이의 환경을 보고, 올리비에는 증오와 함께 어쩔 수 없는 동정을 느꼈을까?


카메라가 쉼없이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를 보여줘도, 결말이 용서를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다. 

그 자신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쩔 수 없는 관찰자인 우리가 어떻게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했을때, 이것이 바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는 보는 우리가 하는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네 몫이 아니야,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인간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 할 수 없고, 영화가 용서와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으로 인간을 정의 할 수 없다는 것.



주인공 '올리비에 구르메'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대부분 뒷모습만 나오지만 이해가 가는 수상이다. 처음엔 평범해 보이는 그의 외모와 다큐멘터리같은 영화에 기대감이 없었지만 

점차 그의 어깨, 뒤통수, 눈, 손, 그가 느끼는 불안이 나에게로 전염되는 듯했다. 영화 자체가 이 배우를 위한 영화인것 같기도 했다.


촬영방법에서 시작해 배우의 연기까지, 아무런사전정보없이 보다가 깊게 몰입해서 본 영화 <아들>.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임에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재밌게 본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