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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일반 소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김혼비


여자와 축구. 운동과는 담 쌓고 지내는 사람으로썬 안어울려 보이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안 어울려 보이는 두 단어 사이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축구 얘기엔 관심이 없어서 처음엔 읽을 생각이 없다가 여기저기 추천글을 보고, 

또 사람들의 젠더적 편견과 무지가 가득한 분야에 선 여성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바로 읽게 됐다. 결과는 대만족!


축구를 모르는 초보자도 읽을 수 있을정도로 친절하고, 유머가 가득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선 여성들의 든든한 연대기


 책을 읽으며 느낀건 내가 접하지 못했을 뿐이지 축구를 좋아하고 직접 뛰고 있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축구만이 아니라 편견과 무지 속에서 있을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더 놀라운건 아마추어 축구 동아리를 이끌어가는 건 40,50대 여성들이라는 것.

주위를 둘러봐도 중년 여성의 서사로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그게 아닌 이야기를 들으니,

거기다 생소한 축구란 분야와 접하니 너무도 색다르고 책 말미에 작가의 말처럼 

진짜 축구라는 운동을 좋아서 하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지만 그게 어떤 '운동'이 된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세상이 일방적으로 나눈 구획들이 선명하게 보일 때면, 우리가 속한팀과 거기서 하고 있는 취미 활동이 그 영역을 어지럽히고 경계를 흐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운동'이 되는 순간이다. 일상에서 개인이 편견에 맞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건 결국 편견의 가짓수를 줄여 나가는 싸움 아닐까. "여자가 oo를 한다고?"라는 문장에서 oo에 들어갈 단어의 숫자를 줄이는 것 같은. 나와 우리 팀과 수많은 여자 축구팀 동료들은 저기서 '축구'라는 단어 하나를 빼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난 고독과 싸운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편하고 조용한 애하고 대체 왜 싸우지?


책 첫머리에선 군중 속 보다는 혼자가 편한 개인주의자 작가가 어떻게 팀 스포츠인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지가 나온다.

단순한 공놀이가 아닌 축구가 가진 마력때문이겠지만 팀스포츠라는 점에서 오는 연대 또한 이 책이 말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고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이기도 하다.


어렸을때부터 축구를 사랑했고 결국엔 아마추어 여성 축구 팀에 들어가게 된 작가의 생각과는 달리 몇몇 선수출신 팀원들 빼고는

팀원 대부분은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 팀원들이 어떻게 아마추어 팀에 들어오게 되고 오년, 십년 이상을 꾸준하게 뛰게 되는지를 보면, 또 어떻게 연대하는지를 보면

유쾌해서 웃음이 나기도하고 마음이 아파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한다.


나를 포함, 대부분의 여자 축구 팬들 머릿속 검색창에 '축구'를 쳤을 때 뜨는 이미지들은 아마 몇 년도 무슨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터뜨린 역전골이라거나, 응원하는 팀이 우승했던 순간, 좋아하는 선수의 안타까운 부상, 이런 것들일 것이다. 반면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를 뼈아픈 실책, 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이 있다. 어느 프로 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오, 생각해보니 이건 이거대로 멋있잖아?


특히나 책을 읽으며 눈에 들어오던건 축구하는 여성들이 흔히 겪는다는 맨스플레인.

옛날에 '꽃보다 누나'라는 예능에서 운전대를 잡은 김희애를 걱정하는 이승기를 보고 김희애가 누나 85년 면허야, 라고 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작가의 말처럼 자신이 아는 것을 남에게 알려주는것은 즐거움이지만 일부 남성들의 꼰대기질은 참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 선수 출신에게 기어코 축구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 

그들에게 보여준 팀원들의 축구 경기는 책 제목처럼 정말로 '우아하고 호쾌한' 축구였다.

그들이 편견과 무지, 맨스플레인에 맞서 지금도 축구에 미쳐 뛰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위안이 되고 용기를 얻는다.


축구와 관련된 제목과, 인상깊은 여러 에피소드들. 

우정, 편견, 죽음, 열정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이 축구에 녹아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에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