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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인간과 인조인간의 벽을 허물다 <블레이드 러너 2049>

(강스포 주의)



미래에 한 회사에서 기억전이 기술을 개발한다. 늙고 병든 몸에서 '기억', 즉 뇌를 새로운 몸에 이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부유한 이들이 이 수술을 받기 위해 줄을 선다. 하지만, 사실은 회사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기억은 전이되지 않고 복제되었을 뿐이다.

늙고 병든 몸의 '진짜' 나와, 나와 똑같은 기억을 가진 새로운 몸의 '가짜'. 진짜는 폐기되고 가짜는 진짜 나인양 살아간다.

이럴때 이 가짜를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은 뭘까?


이런 SF적 상상, 특히 인조인간과 관련된 상상들은 필연적으로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에이 아이>, <아일랜드> 등 인조인간이 등장하는 SF영화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깊이 파고들면 진짜와 진짜의 모습을 본딴 가짜의 차이가 무엇인지, 인간의 정의가 무엇인지 다양한 시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이런 철학적 질문을 담은 영화의 원조격인 <블레이드 러너>는 당시 흥행엔 실패했으나 

위의 영화들에 큰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열광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30년이 지나 올해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의 세계관을 현재에 맞게 시각화했고, 기존의 길에서 조금 더 확장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물론 이번 영화도 다소 아쉬운 흥행실적을 거두면서 전작에 이어 불운의 명작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긴 했다.

반면 불운의 명작, 전작보다 뛰어난 영화라는 평은 과장이라는 의견도 있다. 도대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어떤 영화일까?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얘기하려면 먼저 전작을 알아야한다. 모든 뼈대가 <블레이드 러너(1982)>에 있기 때문이다.


2019년 LA. 우주 식민지 건설이 가능할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했지만 지구는 오염되어 잿빛 건물로 가득찼다.

'타이렐' 사는 외견상 인간과 구별이 불가능한 복제 인간 '리플리컨트'를 만들어 노동노예로 부린다. 

4년이라는 수명과 차별 때문에 탈출한 6명의 리플리컨트. 이들을 잡기 위해 인간과 복제 인간을 구별할 능력을 지닌 경찰인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가 투입된다. 데커드는 타이렐사의 비서 '레이첼'과 협력하지만 그녀가 '리플리컨트'임을 깨닫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블레이드 러너(1982)>는 인간과 인조인간의 모호한 구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혼란을 방지하고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해 조작된 '기억'이 삽입된 리플리컨트들. 

같은 기억을 가지고 같은 행동,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인간과 다른점이 무엇일까?

리플리컨트들은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마지막 로이의 모습은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데커드는 탈출한 리플리컨트들을 한명 한명 죽여나가면서, 리플리컨트인 레이첼을 사랑하게 되면서 인간과 리플리컨트 구분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전작이 인간과 인조인간의 차이에 대한 의문을 말했다면 이번작은 리플리컨트 형사인 'K'를 통해

그렇다면 둘 사이의 벽을 부술 수 있을까?, 진짜 인간이 되려면?, 인간의 정의는 무엇이지? 하는 확장된 질문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시간 순으로 전작 - 단편 3편 - 이번작으로 이어진다.

(단편은 유투브에서 볼 수 있다.) 줄거리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연수명인 리플리컨트가 등장하고, 인간과 리플리컨트의 차이가 갈수록 불분명해질수록 인간 스스로 존재의 위기를 느끼고 

리플리컨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차별받던 리플리컨트들은 대정전을 일으키고 모든 디지털 기록이 삭제된다. 

리플리컨트 생산이 중지되지만 '월레스'는 몰락한 타이렐사를 흡수하고 원하는 수명을 가진, 복종적인 리플리컨트를 생산한다.


(블레이드 러너 2049) 이렇게 해서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혼재된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는 수사를 하다가 리플리컨트 유골을 발견하게 되고

충격적이게도 출산의 흔적까지 찾아낸다. 리플리컨트가 출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 큰 혼란이 야기되므로

이를 덮으려하는 경찰조직. 그리고 더욱 완벽한 리플리컨트를 만들기 위해 K를 찾는 월레스.

K는 충격적 사실 뒤에 자신을 둘러싼 비밀이 존재함을 깨닫고 오래 전 블레이드 러너로 활약했던 데커드를 찾아 나선다. 




영화는 전작의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세계관을 현재에 맞게 시각화해서 보여준다.

 디스토피아 미래의 세기말적 황량하고 쓸쓸한 잿빛 건물들과 키치한 네온사인.

언뜻 전작과 같아 보이지만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와 감독 '드니 빌뇌브'는 

더욱 디테일하고 스케일 큰 세계관을 만들어내면서 감각적인 비쥬얼 영화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인간성에 대한 고민이 2시간 4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천천히, 차곡차곡 쌓여나간다.


"넌 그거 없이도 잘 살아왔어." "뭐 말입니까?" "영혼."


리플리컨트 블레이드 러너 K는 'Skinner(껍데기)'라 차별받으면서도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하지만 내면 깊은 곳엔 인간에 대한 욕망과 외로움이 존재한다.

그런 그가 출산을 한 리플리컨트 유골을 발견하고, 자신이 그 아이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된다.

자신의 것이 아닌 조작된 기억은 끝없이 자신을 고민하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실재'한다고 믿자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그 아이가 자신이 맞다면, 자신과 같은 블레이드 러너들한테 쫓길텐데도 그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환희와 두려움을 느낀다.


K는 자신의 정체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K의 여정을 통해 인조인간이 인간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즉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끝없는 고민이 시작된다.


"진짜 소년에겐 이름이 필요해. K라고 부르기에 당신은 너무 중요해."



인간과 놀라울정도로 닮은 리플리컨트와 인간을 구분짓는 모호한 기준 중 가장 확실하며 인간이 인간임을 나타내는 요소가 무엇일까?

영화는 이번엔 '생식'을 들이민다. 자, 이제 리플리컨트는 출산을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인간과 리플리컨트는 어떻게 구별되지? 하며 극단으로 내몬다.


K를 포함한 영화 속 다양한 캐릭터들은 이 기적 앞에서, 다양한 행동을 보인다.

경찰 국장은 지금 사회가 '벽'위에 서있고, 사실이 알려지면 이 벽이 무너진다고 말한다.

월레스는 완벽한 리플리컨트가 되기 위한 마지막 요소, 생식 기능을 갈망한다.

반란군 수장은 출산된 아이가, 우리가 노예가 아니고 스스로의 주인을 증명하는 존재이며 

옳은 일을 위해 죽는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일이라 말한다.


영화는 이런 다양한 캐릭터들의 고뇌를 통해 생식을 기반으로 한 '인간 정체성'에 대해 다층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고민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생식'이 인간의 기준이 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일까?


영화를 끝까지 보다보면 <블레이드 러너>가 진짜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K는 여정 끝에 결국엔 자신이 선택받은 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서로 사랑한다 믿었던, 자신에게 특별했던 '조이'의 행동 모두가 프로그래밍된 것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정체를 부정당하고 쓸쓸함과 절망에 빠지게 되는 K. 하지만 그는 정체되지 않고 나아간다.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한다.



"너희 신 모델은 인간들 밑이나 닦지. 기적을 본 적이 없으니까."


자신이 그 아이임을 확신할때 내리는 눈과 마지막에 자신이 선택받은 자가 아님을 깨닫고도 스스로 선택을 한 후 맞는 눈이 대치되는듯하다.

리플리컨트가 낳은 아이는 '기적'이지만 K는 '기적'을 넘어선 무언가가 된다. 


거짓말을 못하게 설계된 K가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되고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이미 K는 한계, 벽을 뛰어넘었다.

K는 자신을 부정하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자신의 의지로 데커드를 구하는 선택을 한다.프로그램된 인조인간을 넘어선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기적 이상의 존재가 된 K의 모습은 이 영화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듯하다. 



한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여성캐릭터 활용에 대한 아쉬운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영화에는 여체가 많이 등장한다. 거대한 구조물로 표현되기도 하고,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나신을 빈번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이 모습들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해내려 노력했지만 한편으론 남성의 눈으로 '대상화'되며 성상품화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좋게좋게 해석하자면,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잃어버린 여성성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이 거대한 구조물과 홀로그램으로 표현된 것 같기도 했다.

영화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K와 데커드를 뺀 모든 캐릭터가 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성격이 전형적인 한계가 보이는, 조금의 아쉬운 측면이 있기도 하다.


특히 '조이'. 영화평론가 '듀나'의 평을 빌리자면 과거 하드보일드 탐정물 속 팜므파탈 같은 캐릭터다.

팜므파탈 같은 매력을 지니면서도 탐정의 '보조'로 남는 한계를 지닌 캐릭터. 조이도 K를 보조하며 끝까지 순애를 간직한 조강지처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조이 자체가 한계를 지닌 컴퓨터 프로그램인 이상, 이런 한계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영화가 말하고자 한 바인 것 같기도 했다.



또 다른 캐릭터 '러브'(오른쪽). 전작의 레이첼과 같은 위치에 있지만 이번엔 K를 감시하고 방해하는 악당 역할을 맡았다.

월레스의 밑에서 러브라는 이름을 받을 정도로 사랑받는 존재지만 어디까지나 '사랑받는' 리플리컨트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깊은 내면은 흔들리고,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싸움'을 잘하는 전형적인 악당캐릭터가 되는듯해서 많이 아쉬움이 남았다.


이 밖에도 여성캐릭터들이 조금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전작에서 팬들을 가장 흥분시켰던 떡밥인 데커드의 정체(인간이냐 인조인간이냐)도 영화에 언급된다.

전작에서 데커드는 유니콘과 관련된 꿈을 꾼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유니콘 모양의 종이접기를 발견하는데,

이것이 그가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와 관련해서 감독과 각본가가 발언을 하긴 했지만,

맞다, 아니다로 무수히 많은 추측과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영화에 다시 등장한 데커드.


월레스와 만나는 장면에서 월레스는 출산이 가능한 레이첼과의 운명적 만남이 수학적 계산을 통한 인위적인 설계일 가능성을 암시한다.

데커드는 뭐가 진짜인지는 자신이 안다며 명확한 대답은 피한다.

이것으로 감독은 데커드의 정체에 대한 논쟁을 포용하며, 이 고민이 계속되기를, 팬들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으로 남기를 원한 것 같다.



사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재밌게 본 것과는 별개로, 어째서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우선 전작과 같은 선상에서 확장된 물음을 던지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전작을 포함한 세계관을 이해하거나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면 많이 지루할 것 같았다.

(또는 전작을 우선감상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을 수 있고.)

또한 극적인 요소가 적어서, SF액션 영화를 기대하고 보기에는 긴 러닝타임에 긴박함과 쫀쫀함이 부족했다.

월레스나 반란군 등 갈등요소들은 모두 화두를 던질 뿐, 극적인 충돌은 하지 않는다. 때문에 보면서 이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허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은, 푹 빠져서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생각해볼거리도 많았다.


2시간 40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느린 호흡으로, 묵직한 물음을 던진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매력적인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흠뻑 취해서 영상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먹먹하고 쓸쓸한 기분에 전염되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운에 잠기게 만드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