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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일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 - 정세랑


'퇴마'라는 소재를 좋아한다. 죽음 이후의 것들이나 귀신 등의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 

나만 관심있는게 아닌지 가벼운 소설에선 자주 쓰이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목받는 작가가 자칫 그런 뻔한 소설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소설을 썼다니!

거기다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다니는 보건교사? 궁금한 마음에 이북으로 구매하고 얼른 읽었다.


주인공 안은영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내뿜는 것들 뿐만 아니라 남들은 보지 못하는 온갖것들을 볼 수 있고 퇴치할 수 있다. 그녀가 근무하는 사립학교 M고는 특히 이상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미스테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안은영은 보건고사로 일하는 틈틈이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이를 해결하러 다닌다. 

그러다가 기운이 딸리면 학교 설립자의 외손자이자 한문교사인 홍인표의 손을 잡고 그의 거대한 에너지를 배터리처럼 충전하기도 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에피소드 식으로 이어져있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안은영이 이를 해결하는 식이다.

중요한 일만 서술되고 생략이 많기 때문에 굉장히 술술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사건들을 다루는게 진지하지 않고 다소 가볍기도 해서 초중반까지는 정말 가벼운 소설을 읽는 것 같아 많이 아쉽기도했다. 대책없는 해피엔딩도 일반소설이 아닌 장르소설을 읽는 것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가고 에피소드들이 조금 감동적으로 변하게 되자 소설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됐는데,

쉽게 쉽게, 털털하고 쿨하게 행동하는 소설진행과 안은영이 사실은 은연중에 아픔과 고뇌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는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때문에, 이를 티내지 않기에는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소외되고 혼자였던 주인공. 그녀가 이를 삶으로 받아들이고 아무런 대가 없이 퇴마를 하며 세상에 친절을 베푸기까지. 

그녀의 고뇌와 아픔이 에피소드 중간중간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데, 이게 참 좋았었다. 

그리고 에피소드의 주인공들도 학교를 다니는 어린나이지만, 미성숙하기에 또는 인간관계에 치여서 각자 아픔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퇴마와 연관되어 소설이 진행되어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안은영이 깔끔히 해결하기 때문에 속시원하기도.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뭐라고?"

"장르를 잘못 택했단 말야. 칙칙한 호러물이 아니라 마구 달리는 소년 만화여야 했다고. 그랬으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았을거야. 그 꼴로 다치지도 않았을 거고."

"만화가 아니야."

"그렇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내가 한번 그려 봤지."

~

캐릭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르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우개가 명중하는 순간 은영은 예감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은영은 사실 강선의 설정인 셈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인 <가로등 아래 김강선> 중에서-


이 외에도 안은영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특히 재미있었다. 

스무살을 넘지 못하는 벌레먹는 npc가 나왔던 ㅋㅋㅋ <전학생 옴>도 좋았고.

마지막 에피소드 <돌풍 속에 우리 둘이 안고 있었지>는 홍인표와 안은영의 로맨스가 드러나고, 

소설이 훈훈하고 기분좋게 마무리되서, 이것도 좋았다 ㅎㅎ


사실 홍인표와 안은영은 소설내내 붙어있긴 하지만 소설에서 딱히 로맨스가 나오진 않는다. 

소설의 서술방식인 생략과 쿨함으로 이들 관계도 설명된다. 하지만 은연중에 설레는 요소들이 톡톡 튀어나오는데

이게 그렇게 설렐 수가 없더라. "니가 안 만나 줬잖아!" ㅋㅋㅋㅋ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그동안 소설에선 생략으로 진행됐던 그들의 속사정이 드러나는데, 훈훈하고 좋았다.


가볍게, 기분좋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