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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일반 소설

열세 번째 이야기 - 다이앤 세터필드


소설을 읽다보면 할 이야기가 없는데 억지로 늘여놓은 소설이 있는 반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구나, 하는소설이 있다.

<열세 번째 이야기>는 후자로, 오랜만에 작가가 제대로된 이야기꾼인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야기꾼이 쓴 소설을 읽으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큰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렇게 말해놓고 거의 보름을 읽었지만 ㅋㅋ)


아버지의 헌책방에서 책을 읽으며 살고 있는 마거릿 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전기를 쓰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발신자는 '금세기의 디킨스'로 불리는 유명 작가 비다 윈터.

그녀는 평생 거짓 인터뷰로 자신을 감춘채 살아왔으며 이제는 진실을 말하고 싶다고 마거릿을 불러들인다.

거절하려던 마거릿은 비다 윈터의 편지와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흔들려 비다 윈터의 저택을 찾고, 

비다 윈터로부터 18세기 영국 시골 마을 앤젤필드 가의 3대에 걸친 기묘한 사건을 듣게 되는데...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이야기 #쌍둥이 #비밀


소설의 주인공 마거릿은 오래된 책을 사고 파는 아버지밑에서 사람보다 책을 가까이 지낸 인물이다.

게다가 작중 유명작가인 비다 윈터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며 소설은 그녀가 들려주는 과거이야기로 진행된다.

책 속의 책.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 얼마나 매력적인 소재인지.

책이야기가 나오는 책이 풍기는 독특한 매력도 물론 소설에 담겨있지만

할말이 차고 넘치는 작가가 풀어내는 비다 윈터의 몇 대를 걸친 이야기는 천명관의 <고래>가 떠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책을 처음읽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던 문체!

맨뒷장의 번역가의 말처럼 다이앤 세터필드라는 작가 자체가 뛰어난 이야기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번역을 잘한것인지

글이 어색함없이 술술 넘어갔고, 적절한 비유와 재치는 소설만이 풍기는 독특한 매력에 일조하는듯했다.

이는 첫장에 주인공이 받는 비다 윈터의 편지를 읽으면 바로 알 수 있는데, 내가 주인공이 된것처럼 비다윈터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나의 불만은,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에 대한 것이지요. 지어낸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진실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주던가요? 

포효하는 한 마리 곰처럼 굴뚝 위에서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밤, 진실이 도움이 되던가요? 침실 벽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빗줄기가 그 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릴 때는 또 어떤가요? 전혀 쓸모가 없지요. 오싹한 두려움이 침대 위에서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 때,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앙상한 뼈다귀 같은 

진실이 당신을 구하러 달려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겠지요. 그럴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이야기의 위안이지요. 

거짓말이 주는 아늑함과 포근함 말이에요.

<열세 번째 이야기, 14p>


소설의 문체뿐만 아니라 소설이 풍기는 매혹적인, 독특한, 슬픈, 아름다운, 음산한, 기이한, 독특한, 신비로운(옮긴이의 말 출처) 분위기도 

소설을 읽는 큰 즐거움이었다.


이런 책의 분위기는'쌍둥이'라는 키워드에서 오는 기묘하고 신비한 분위기 때문인것같기도하다.

쌍둥이는 마거릿 자체가 태어날때 한몸처럼 붙어있던 자신의 자매를 잃은 상처가 있는 인물이고,

비다 윈터가 이야기하는 과거에서도 에덜린, 에멀린이라는 쌍둥이가 등장하기 때문에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이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열세 번째 이야기>는 쌍둥이 신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같다.

한 자궁에서 태어난 똑같이 생긴 사람.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에겐 우리가 모르는 어떤것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존재한다.

얼마 전 쌍둥이에 대한 짤막한 유투브영상을 보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쌍둥이에 대한 환상은 상상일뿐이라는걸 깨닫긴했지만,

어쨋든 내가 쌍둥이가 아니고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할때부터 신비롭게 바라보던 눈이 아직까지 작용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유대가 있기 때문인지 소설은 굉장히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소설 속에서는 쌍둥이를 두개의 몸으로 갈라진 하나의 영혼으로 해석하며, 쌍둥이 한쪽의 죽음이 주요 등장인물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힌다.

비다 윈터가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비밀스럽고 고통스럽다. 

음습하고 녹슬어가는 저택에서 살아가는 한 가문의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기도 하고.


그러나 비다윈터는 힘겹게도 이야기를 완주하게되고 마거릿은 이야기 속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비다 윈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대를 걸쳐 엔젤필드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괴이하면서 매혹적인 일들 사이에 어떤 비밀과 반전이 숨겨져있는지

마거릿과 함께 물음표를 가지고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이야기의 완주 후 매혹적이지만 거짓된 이야기로 살았던 비다 윈터가 진실로, 짐을 내려놓게 되고,

마거릿이 묻어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게되는 것 또한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기도 했다.


읽는 데 오래시간이 걸리긴했지만 중후반은 앉은자리에서 다읽은, 몰입감있었던 소설 <열세 번째 이야기>

"옛날옛날에 유령이 사는 저택이 있었어. 그리고 책으로 가득한 방에는... 쌍둥이 소녀가 살았지."

책 표지에 있는 글처럼 책과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이 소설도 분명 만족할것같다.